//BYLINE// 현실이 반영되지 않은 문화에 대해 혹자는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표현을 한다. 그만큼 문화에는 사회적 분위기, 시대상, 생활 수준 등등 다양한 요소들이 용해돼 있다.
그 중에서 음악의 의미는 남다르다. 특히 노래라는 것의 힘이 대단해서, 농경사회에서는 고된 노동을 할 때 노동요를 불렀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첫 번째 단계가 바로 그 나라의 국가를 빼앗는 것이기도 했다. 정신적인 부분까지 관여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살기 힘들다는 말을, 살기 좋다는 말보다 많이 한다. 물론, 기성세대의 “나 때는 안 그랬다”와 비슷한 빈도로 쓰이는 말이지만, 체감 강도는 어째 점점 세지고 있다. 그래서 ‘헬조선’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마저, 관용적으로 사용된다.
빈부격차, 성차별 등의 이유 때문에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야 하는 계층이 비대해지면서 먹고 살기 힘든 현실에 대한 담론이 넓게 형성됐다. 과연, 현재 가요는 이런 사회의 단면을 얼마나 담고 있을까. (*조사 대상은 2014년 10월~2015년 9월까지 1년 간 음원차트 월간 톱100에 들었던 곡으로 했다.)
# 사랑은 더 가볍게
다 싫어서 연애도 포기한다는 '헬조선'인데도 음원차트는 사랑 노래가 점령했다. 대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팍팍함 때문인지 가사는 갈수록 가벼워진다. 격정적인 연애보다, 뜨거운 이별보다 더 크게 화제되는 것이 알쏭달쏭한 '썸'이다. 깊어지면 안 되는 관계, 언제든 쿨하게 정리될 수 있는 관계, 상대에게 많은 권리를 주지 않는 관계 말이다.
'이럴 거면 바래다주었던 그날 밤 넌 나를 안아주지 말았어야지/ 설렘에 밤잠 설치게 했던 그 말 그 말도 말았어야지 /잠 못 들어 아픈 이 새벽 잘 지내니 문자 한번쯤은 해주지/ 혹시나 하며 올린 우리 얘기에 좋아요 누르지 말지 /괜히 기대하게'(백아연 '이럴 거면 그러지말지')
‘우리 조만간 봐요 /넌 항상 그렇게 말해요 /지키지 않을 약속이란 걸 알아도 난 좋아 그러니까 조만간 언제 봐요 정확한 날짜를 말해 봐요’(프라이머리 ‘조만간 봐요’)
# 이별은 더 아프게
유행가에 사랑 노래가 많은 건, 가장 공감대 넓은 주제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 노래만큼 많은 것이 바로 이별 노래다. 최근 동향이라고 하면 이별 후 되돌아 보는 '사랑'이 '분노'로 수렴된다는 것. 악담을 하고 저주를 하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욕도 한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소름끼치니까 /내 이름 부르지 마 듣기 싫으니까 (…) 됐어 필요 없어꺼져/ 내 몸에 손대지 마 /잘 생각해 계산이 느리니 / 눈부신 날 놓친 걸 넌 후회하게 될 걸'(에일리 '손대지마')
'넌 계속 악쓰고 있고 젠장 뭐 답도 없지/ 내가 널 밀치면 니가 날 밀쳐 서로 씩씩거리면서 더럽게 질척이는데 나 완전 미쳐 (…)너랑 꼭 똑같은 사람 만나 쓰레기 새끼야'(매드클라운 '화')
아니면, 희로애락이 상실되고, 미화된 기억만 남은 것 같은 해탈의 경지도 있다.
'기억하나요/ 우리 함께 했던 시간 설레이나요/ 한땐 모든 것이었던 이제는 가끔 생각나는 그때 (…) 그래도 가끔 그때 생각엔 여전히 웃음만 나죠'(에이핑크 '러브(LUV)')
# 청춘은 위로받을 존재로
스펙병, 삼포/오포/칠포 세대 등의 신조어가 생겨난 2014년과 2015년. 공허한 마음을 위로하는 가사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주제와 타깃은 청춘이 아닐지라도, ‘힐링’에 초점을 맞춘 가사들은 듣는 이들을 위로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고갤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괜히 나만 우울한가 봐/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는 것 같아/ 기분 좋은 남들처럼 아름답기만 한 하루가 나도 시작될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구름이 몰려/ 또 한바탕 소나기를 뿌리고 우산 따위 있을리 없지’(10cm ‘10월의 날씨’)
‘쉽지 않죠 바쁘죠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죠/ 바라는 게 더럽게 많죠/ 그렇죠 쉬고 싶죠 시끄럽죠 다 성가시죠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자이언티 ‘꺼내 먹어요’)
‘친구가 휴가 나왔어 하는 말이 무섭대/ 대학서 배운 건 다 까먹었어 실업자 100만 시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 숫자가 차라리 통장 잔고였음 좋겠어/ 시끄러운 알람이 새벽부터 날 계속 재촉해 쫓기듯 나선 집 밖은 틈 없는 벼랑 끝 같아/ 뭘 하고 있지 아니 뭘 해야 하지 답이 없는 메아리 (…) 힘들어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잘 될 거예요’(비투비 ‘괜찮아요’)
박효신은 ‘야생화’,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 등 러브송보다 힐링송이 더 많았다는 의외의 이력을 보여줬다. ‘해피투게더’는 각박하고 치열한 세상 속에서 잘 버텨낸 이들을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작은 돌에 그만 넘어져도 일어나 다시 그 길 따라 걸어보렴 좀 더디면 어때 어디든 좋아 한 걸음씩’(박효신 ‘해피투게더’)
# 가끔은 그냥 내가 최고할래!
‘축 처진 어깨, 지친 하루’로 정리되는 우리들의 일상은, 자존감을 세워주는 가사를 통해 일탈을 경험한다. 최근 대중가요계에서 힙합이 강세를 보이면서, 자신감을 넘어선 허세, 스웨그라는 이름 하에 마구 뽐내지는 자기자랑 같은 내용이 차트를 채웠다.
공감은 되지 않을지라도, 우유체로 화려하게 꾸며진 말보다는 간단명료, 거칠기까지한 가사들이 요즘 젊은이들의 성향을 대변했다.
'만만하게 봤다면 척추 꺾어줘 /귀엽게 봤다면 내게 잘못 걸리느니 쳐맞는게 나을걸 /벌써 몇놈 혓바닥을 접어놨어/ 평화를 추구 꼰대질에 썩은 웃음 /그 때의 나로 유추해 내 신경을 들쑤셨다간 코로 마시게 될거야 술 분수'(자메즈, 앤덥, 송민호 '거북선')
'어깨 힘 빼고 이제는 배워 /완전히 정복해 여자판 나폴레옹/ 이제 씹을 거리 없지 /단물 빠진 껌을 억지로 질겅 씹어 봐라 /가출해 니 턱주가리 /가슴에 턱 붙여 빨리 /고개 끄덕'(지민 '푸스(PUSS)')
걸크러시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나왔던 포미닛 역시, 부드러운 사랑 노래보다는 주위 시선 신경 안 쓰고 즐기는 나를 중심에 세웠다.
‘더는 널 외롭게 하지 마/ 눈앞에 세상에 이제 숨겨온 널 찾아봐 투나잇/ 미쳐 소리 질러 즐겨/ 또 이 밤이 가잖아 다 뛰어 흔들어’(포미닛 ‘미쳐)’
# 토이, 혁오가 만든 위로 공감대
여전히 많은 후크송, 어지러운 영어 가사,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나열되는 유행가 사이에서 혁오, 토이의 앨범은 '유의미'한 자취를 남겼다. 혁오는 생명력을 잃은 일상을 살아가는 듯한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탄탄한 지지기반을 쌓는데 성공했다.
'오늘도 의미없는 또 하루가 흘러가죠/ 사랑도 끼리끼리 하는거라 믿는 나는 좀처럼 두근두근 거릴일이 전혀없죠/ 사람들 북적대는 출근길의 지하철엔 좀처럼 카드찍고 타볼일이 전혀 없죠/ 집에서 뒹굴뒹굴 할 일없어 빈둥대는 내 모습 너무 초라해서 정말 죄송하죠'('위잉위잉')
토이는 지난해 발표한 정규 7집에서 7년 간의 갈증을 채워 줄 절절한 가사들을 담았고, 큰 인기를 누렸다. 수록곡에는 토이가 자랑하는 특유의 러브스토리도 있었지만, 인간의 외로움을 건드리고 위로하는 내용도 많았다.
‘그렇게 우린 변해가고 시간은 멋대로 흐르고 하나둘씩 떠나네 저 멀리 이사를 가고 돌아올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우린 행복해진 걸까’(‘취한밤’)
‘조금씩 나를 잃어 가고 있어 여기가 난 어딘지 모르겠어 자 떠나야 해 길을 나서야 해 어딜 향해 가는지 몰라도 어디서부터 난 잘못됐을까 모든 건 내 맘 같을 수 없잖아 다 지워야 해 살아내야만 해 모두 다 제 갈 길로’(‘리셋’)
# 30년 전 우리는...
방송가에서 통하는 콘셉트가 있다. 바로 '복고'다. 옛 향수를 건드려서 흥하지 않았던 프로그램이 없었다. '쎄씨봉 콘서트',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와 같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세월은 흘러갔지만 그 때의 감성은 아직까지 유효한 듯 하다. 그래서 10년, 20년도 부족해서 30년 전을 둘러봤다. 어떻게 보면 당시의 팍팍한 현실이 2015년의 한국과 매우 닮아있으니 말이다.
음원차트와 이용 연령을 견줘볼 수 있는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수상곡을 중점적으로 살펴봤다. 나팔바지에, 통기타, 장발머리, 통금시간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시절, 억압이 곧 일상이라던 그 시절, 동시에 어느 때보다 낭만이 지배했다고 말하는 시절의 노래들이다.
'안개 속을 걸어봐도 채워지지 않는 나의 빈 가슴 잡으려면 어느새 사라지는 젊음의 무지개여/ 커피를 마셔봐도 느낄수가 없는 나의 빈가슴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젊음의 고독이여'(유미리 '젊음의 노트', 1986)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 본다 설 익은 햇살에 젖은 파도는 눈물 인듯 씻기워 간다'(높은 음자리 '바다에 누워', 1985)
'비 쏟아지는 밤에 먼 추억으로 나는 가리 비 세차게 내려다오 내 뺨 위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도록 눈물을 바람 불어오는 밤에 먼 추억으로 나는 가리'(전영록 '하얀 밤에', 1987)
'언제 가셨는데 안오시나 한잎두고 가신님아 가지위에 눈물 적셔놓고 이는 바람소리 남겨놓고 앙상한 가지 위에 그 잎새는 한 잎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외로움만 더해가네 밤새 새소리에 지쳐버린 한잎마저 떨어지려나 먼곳에 계셨어도 피우리라 못다핀 꽃 한송이 피우리라'(김수철 '못다핀 꽃 한 송이', 1984)
# 2015년, 가요와 우리의 거리는 ?
요즘 가요들은 무거운 고민을 말하지 않는다. 메시지를 담은 노래보다 무의미한 의성어의 반복 쯤으로 보이는 음악이 훨씬 사랑을 받는다. 죽을 것처럼 끙끙 앓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힘든 와중에 욕을 섞어 말하면서 센 척을 한다. 확실한 건, 듣는 이에게 위로를 건네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는 쉽고 편안한 것들이 흐름이 된 거죠. 이해가 가능한 내용으로 위안을 받으려고 해요. 예전에는 멋을 부리면서 말하는 게 음악이었다면 이제는 솔직하고 공감할 수 있고 꾸미지 않은 걸 멋이고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가요제작사 대표 A씨)
굳이 음악을 통해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 것은 음반산업의 변화, 음악 소비형태의 변화 등 다양한 사회적 변화에 부합했다는 의견이다.
"SNS라든지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많아졌으니까, 굳이 음악을 통해서까지 사회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기성세대들에 대한 불만,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것들에 피로도가 높아진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음악에서까지 정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의도도 있어 보이고요."(가요제작사 대표 B씨)
"음악이 과거에 예술의 분야에 있었다면, 이제는 소비의 분야로 넘어왔어요. 예술을 하듯, 부르는 사람이 원하는 내용을 담기보다, 소비자가 원하는 취향을 넣으려고 해요. 사람들은 카페에서, 어디 매장에서 나오는 음악으로 가요를 소비해요. 그러니 사람들은 어려운 가사를 듣지 못하죠. 예전처럼 집에서 이어폰 꽂고 워크맨, 씨디피로 듣는 게 아니니까. 요즘은 믹싱, 마스터링 방법도 바뀌어서 카페에서 듣기에 좋은 방식으로 한다. 철저히 소비자 중심적인 음악이 된 거예요."(가요제작사 대표 C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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