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LINE// #신작 ‘내부자들’은 부패한 권력자를 상대로 싸우는 힘없는 검사와 정치깡패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치인, 기업가, 언론인의 유착은 부패를 낳고, 대한민국은 그들에 의해 돌아간다. 보수언론 논설위원 이강희(백윤식 분)는 대중을 개와 돼지에 비교하고, 장필우(이경영 분)는 대기업 수장인 오회장(김홍파 분)의 비자금에 힘입어 유력한 대권 후보로 성장한다.
#올해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는 ‘베테랑’이다. 지난 8월 개봉해 1,300만 여명의 관객을 모았다. ‘베테랑’의 미덕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순진’한 명제를 유쾌하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제가 있다. 부가 부를 낳고, 본인의 노력으로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때문에 선량한 약자가 악랄한 강자를 일망타진하는 ‘베테랑’이 대중에 선사한 카타르시스는 꽤 상당했다.
영화 속 현실 풍자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부터 ‘설국열차’까지 봉준호 감독의 작품에는 늘 현실 비틀기가 담겨 있다. 류승완 감독은 전작 ‘부당거래’를 통해 부조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줬다. 다만 최근 들어 특별한 것은 부당한 현실을 전적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주목받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개봉한 영화들에서 안타까운 현실을 포착해 봤다.
# ‘베테랑’ : 이곳은 ‘금수저’ 월드
영화 ‘베테랑’의 이야기 중심은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 분)다. 조태오는 배경을 제외하고는 특별하지 않은 인물이다. 맷돌의 ‘어이’과 ‘어처구니’를 헷갈려 하며, 싸움을 잘하고 다혈질이라는 특이사항이 있을 뿐이다. 그는 서자라는 자신의 출생을 탓하며 열등감을 폭력적으로 드러낸다. 경호원들끼리 내기 싸움을 붙이는가 하면, 부하 직원이나 여자, 애완견 등 약자를 병적으로 괴롭힌다. 경호원의 맨몸을 담뱃불로 지지고, 자신의 말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여자의 얼굴에 케이크를 문지른다. 상습적인 약물 복용은 덤이다.
그러나 조태오는 제재 받지 않는다. 재벌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고작’ 400만원으로 시위를 하는 화물운송 기사의 폭행을 스스럼 없이 조장하고 수표를 건넨다. 일이 잘못되자 양심의 가책은커녕 번거롭게 됐다고 여긴다. 돈으로 세상을 사는 세습 재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조태오가 만신창이가 된 배기사(정웅인 분)에게 파이트머니를 쥐어줄 때, 배기사가 화장실에서 피 묻은 휴지를 입에서 빼낼 때, ‘금수저’ 조태오에 대한 불편함은 극을 달한다.
놀라운 것은 유사한 사건이 실재했다는 점이다. 바로 SK그룹 창업주인 고 최종현 회장의 조카인 물류업체 M&M 최철원 전 대표 사건이다. 영화에서 조태오는 벌을 받지만, 최 전 대표는 집행유예로 실형을 면했다.
# ‘오피스’&‘성실한 나라’& ‘열정같은’ : 성실함은 미덕인가
지난 여름 성실함에 대해 이야기한 두 영화가 눈길을 끌었다. 영화 ‘오피스’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착실한 사람들이다. ‘오피스’ 속 김병국 과장(배성우 분)은 팀 내에서 ‘좋은 분’으로 통한다. 이 표현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분’은 착하지만 영악하지 못하고 어수룩한 사람이란 풀이가 들어간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인턴 다미(손수현 분)에게 뒤처지는 미례(고아성 분)와 김병국 과장의 모습은 묘하게 겹쳐진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우리 사회는 열심히 일을 할수록 나락으로 빠지는 이상한 나라다. 수남(이정현 분)은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9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한다. 청소부, 신문배달 등 고된 일도 마다하는 법이 없다. 투잡(two-job)을 넘어 파이브잡(five-job)까지 뛰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대출 이자다. 수남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이 무색하다.
그리하여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궐기한다.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 스스로 행동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드러내는 분노는 잔혹하지만 슬프다. 현실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보상을 받지 못한다. 같은 일을 해도 계약 형태에 따라 연봉과 혜택이 다르다.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오피스’ 속 미례처럼 불안한 고용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경우도 많아졌다.
신작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역시 “단 한 순간도 열심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사회초년생 도라희(박보영 분)의 이야기를 다룬다. 열정과 성실을 밑짐 삼아 세상에 발을 내딛지만 현실은 그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다.
# ‘소수의견’&‘돌연변이’&‘내부자들’ - 약육강식의 세계
영화 ‘소수의견’과 ‘돌연변이’는 가난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야기한다. ‘소수의견’은 국선변호사 윤진원(윤계상 분)이 강제철거 현장에서 아들이 죽자 격분한 나머지 경찰을 죽음으로 몬 한 아버지 박재호(이경영 분)를 변호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영화는 정의와 진실을 강조하거나 극적으로 그려내지 않고 담담하게 비정한 현실을 담아낸다. 용산 참사를 연상시키는 소재 탓인지, 작품 외적으로도 우여곡절이 많은 작품이었다.
각종 풍자가 담긴 ‘돌연변이’ 역시 마찬가지다. 평범한 취업준비생 구(이광수 분)는 30만원을 벌기위해 제약회사 생체실험에 참여했다가 생선인간이 된다. 구의 딱한 처지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구를 응원한다. 따뜻한 환호도 잠시, 대기업이 제약회사를 매입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오히려 구가 사회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놓인다. 상원(이천희 분)이 그를 도우려 하지만, 상원 역시 시용기자라는 자신의 처지에서 자유롭지 않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해야 한다. 두 작품에선 철거민, 지방대 출신 변호사나 기자 지망생, 취업준비생에게 법이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신작 ‘내부자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족보없는’ 우 검사(조승우 분)는 조직에 헌신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정직과 지방 발령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돈도, ‘빽’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법이 거대 권력의 방패가 돼 이들을 좌절케 한다. 세 작품의 주제나 분위기, 결말은 전혀 다르지만,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진= 영화 ‘내부자들’ ‘베테랑’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소수의견’ ‘돌연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