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걸크러쉬 아닌데

기사입력 2016.10.20 4:2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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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이드 = 강효진 기자] 구글에 걸크러쉬를 검색해보자. 관련 사진을 보면 진한 아이라인, 레드립, 톰보이 스타일링, 강한 콘셉트의 걸그룹 사진들이 주를 이룬다. 이것이 요즘 미디어에서 이용하고 있는 걸크러쉬라는 단어의 이미지다.


몇몇 신조어들이 점점 왜곡되는 것처럼 이 단어는 분명히 잘못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전부터 ‘엄친아’의 의미가 지나치게 확장돼서 자기가 똑똑하고 잘난 게 아닌 부모가 잘난 금수저의 대치어로 쓰였던 거라면, 걸크러쉬는 ‘강한 여자’라는 한정적인 의미로 축소됐다.


초반에 잘못 쓰이기 시작한 걸크러쉬는 보이시한 스타일을 가졌거나, 강렬한 스타일링으로 남성적 이미지를 입은 여성에게 수식됐다. 그리고 지금의 걸크러쉬는 멋지게 할 말 다 하는, 능력 있고 잘나가는, 힘이 센 언니까지 포괄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게 뭐가 이상한 건가 싶겠지만, 분명 잘못됐다.





# 걸크러쉬의 의미 : 그거 그런 뜻 아닌데요


걸크러쉬의 사전적 의미는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반한다는 뜻이다. 'Crush' 라는 표현이 들어있어 여성답지 않은 강렬한 이미지를 연상시켜 톰보이 스타일과 연관 짓기 쉽지만 전혀 다르다. 명사로 쓰이는 Crush에 포함된 ‘강렬한 사랑, 홀딱 반하다’라는 의미와 Girl이 결합된 조어이기 때문에 대상의 유형 따위는 애초에 정해져있는 게 아니었던 거다.


단지 여자도 반할만큼 매력적인 모든 여자에게 쓰일 수 있는 표현을 하나의 틀에 가둬버린 셈이다.





걸크러쉬에 대한 가장 큰 착각은 어떤 스타일이나 이미지가 고정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여기엔 어떤 유형이라는 것이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반할 때 한 가지 조건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스타일은 걸크러쉬 아닌데? 걸크러쉬는 저런 거 아니야?’ 라며 톰보이나 카리스마 유형을 고집한다는 건 또 다른 고정관념이 된다.


여기에 깔린 어떤 고집은 어쩌면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지 같은 여자를 좋아할 리 없다. 고로 여자가 좋아하는 여자는 남성스러운 스타일을 가졌거나 여자답지 않게 진취적이고 멋지고 강한 모습을 가진 유형이다’라는 위험한 편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





# 그럼 뭐가 걸크러쉬인데?


그렇다고 톰보이 스타일이 걸크러쉬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톰보이도 걸크러쉬를 유발하는 하나의 스타일일 뿐이라는 얘기다. 터프한 여자, 강한 여자, 섹시한 여자, 청순한 여자, 귀여운 여자, 똑똑한 여자 모두 걸크러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오래된 드라마 ‘커피프린스’의 고은찬(윤은혜 분)과 한유주(채정안 분)는 여성으로서 극과 극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만 둘 다 여성 시청자들에게 걸크러쉬를 유발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스타일이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가 매력적이냐, 아니냐의 문제였던 거다.





그러니 당연히 매력적인 인기 여자 연예인은 전부 걸크러쉬의 대상이다. 국민 첫사랑 수지도, 보이쉬한 엠버도, 섹시 보컬 경리도, 도도한 이미지의 크리스탈도, 가모장적인 김숙도, 남자보다 강한 이시영도, 노래 잘하는 효린도, 유쾌한 마마무도, 신비로운 레드벨벳도! 이렇게 소환하다가는 끝도 없을 만큼 전부 다 말이다.





사실 국내에서 팬덤 활동의 주축이 되는 건 전부 여성이다. 인기 보이그룹 팬덤의 구성원이 순금보다 높은 비율의 여성 팬들로 구성된 것은 당연하고, 웬만한 걸그룹 팬덤 성비도 여성이 압도적이다.


대중에게는 섹시한 이미지가 강한 나인뮤지스는 여성 팬덤이 강력한 팀으로도 유명하고, 국내 대표 걸그룹인 소녀시대의 팬덤도 여성이 과반수다. 이밖에도 대세 걸그룹 중 여성 팬덤이 없는 팀은 없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그냥 좋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걸크러쉬라고 돌려 말할 이유가 뭐냔 말이다.





# 차라리 걸크러쉬란 말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인 박보검을 좋아하는 건 자연스럽지만 수지나 아이유에 열광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좋아할 순 있지만 대중적 호감 이상의 콘서트, 팬미팅까지 간다고 하면 온갖 추궁을 하기도 한다.


드물게 있는 보이그룹의 남자 팬들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걸 상상해보면 좀 와 닿을까? 여자는 여자의 팬이 될 수 없고, 남자는 남자의 팬이 될 수 없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걸크러쉬라는 표현이 대중화되면서 여덕들은 여자가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명쾌하게 해명할 수 있게 됐다. ‘왜 남자 연예인도 많은데 여자를 좋아해?’라는 바보 같은 물음에 ‘좀 좋아하면 안 되니? 예쁘잖아! 귀엽잖아! 잘하잖아! 똑똑하잖아! 멋지잖아!’ 라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거다.


물론 걸크러쉬라고 똘똘 뭉쳐 포장을 해놓긴 했지만 이건 결국 ‘여자가 여자에게 반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이해가 안 되지만 ‘걸크러쉬’는 납득이 된다니, 이거 완전 ‘계피 말고 시나몬 주세요’, ‘마늘 말고 갈릭 주세요’ 같은 상황이다.





유튜브 스타 제나 마블스는 걸크러쉬에 대한 정의를 3단계에 걸쳐 표현했다. 이 영상은 약 1167만뷰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는데,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단계는 호감 :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다.


2단계는 동경 : 나는 너와 닮고 싶다.


3단계는 에로스 : 호감 이상의 애정과 충동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당장 짐을 싸서 따라나선다고 할 정도로 강한 애정이다. 이렇게 보면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감정과 전혀 다르지 않은 과정이다.


물론 이제는 걸크러쉬라는 표현이 뜬 덕분에 여자 연예인에게 반한 여덕들은 이해되지 않는 존재가 아닌 반드시 잡아야 할 귀한 고객들이 됐다. 요새는 대놓고 걸크러쉬를 노리는 마케팅까지 등장할 정도니까.


그렇다고 썩 기뻐할 현상도 아니다. 오히려 이 표현은 사라지는 게 나을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 됐다. 걸크러쉬라는 단어가 존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여자 연예인이 좋아’라고 말하기 보다는 ‘아 그냥 걸크러쉬야~’라고 방패를 내세우게 되는 또 하나의 코르셋이 되기도 한 거다.


생각해보면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굳이 맨크러쉬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든 좋아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가치에 모두가 공감한다면 걸크러쉬라는 표현 역시 쓸 필요가 없다. 박지성과 호날두에게 열광하던 남자들에게 “남자가 왜 남자를 좋아해?”라거나 성적 취향을 묻는 무례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픽 = 안경실

사진 = Mnet '언프리티랩스타' 캡처, 경리 인스타그램, 수지 인스타그램, 현아 인스타그램, MBC '별바라기' 캡처, 유튜브 제나 마블스 영상 캡처, KBS '연예가중계' 캡처, 트와이스TV 캡처, MBC '커피프린스'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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